영구미제로 남은 O. J. 심슨 사건을 아시나요?
- 2020. 10. 25

우리나라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있다면 미국에는 O. J. 심슨 사건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수사팀을 무수히 괴롭힌 사건이랍니다.

O. J. 심슨 사건은 미국의 유명 풋볼 선수였던 O. J. 심슨(흑인)이 백인 아내(니콜 심슨)와 아내의 친구(론 골드만)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시작된다. 당시 검찰 측이 배심원단에 제시한 증거들을 보면 일견 O. J. 심슨의 혐의는 명백해 보인다. 증거는 아래와 같답니다.


- O.J.심슨의 양말에 묻은 혈액에서 피해자인 니콜 심슨의 DNA가 검출됐다.

- 론 골드만의 셔츠에서 O. J. 심슨의 것과 인종적으로 같은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 사건 현장 근처에 떨어진 피가 묻은 왼쪽 장갑에서, O.J.심슨, 니콜 심슨, 론 골드만 세 명 모두의 DNA가 검출됐답니다.

- O.J.심슨은 왼손잡이다.

- 해당 장갑과 짝이 맞는 오른쪽 장갑이 O.J.심슨의 집에서 발견됐다.

- O.J.심슨이 전처이자 피해자인 니콜 심슨에 대한 상습적 폭행으로 고발된 적이 있었다.

- 사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발자국의 사이즈가 O. J. 심슨의 발 사이즈와 일치했습니다.

- 론 골드만의 혈액이 당시 O.J.심슨이 입고 있던 셔츠에서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런 증거들을 갖고도 검찰은 O. J. 심슨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가장 핵심적인 증거물이라고 보였던 '피가 묻은 장갑'을 O. J. 심슨이 법정에서 직접 손에 끼려고 했는데,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아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본 검사 측은 '멘붕'했고, 12명 중 흑인이 9명이던 배심원단은 무죄를 평결했답니다.

사건 이후 여러 곳에서 반론이 나왔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피나 물과 같은 액체가 묻었을 때 줄어들기 때문에 손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러나 재반론에 따르면 액체가 묻어서 작아지는 정도는 그렇게 크지 않고, 자신이 쓰던 장갑을 손에 제대로 끼우지도 못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정말 범인은 누구인가? 당시 사건을 재수사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던 헨리 리 박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범인은 O. J. 심슨의 아들인 제이슨 심슨(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위에 논란이 됐던 '피 묻은 장갑'이 사실은 제이슨 심슨에게 니콜 심슨이 준 선물이었고, 현장에서 발견된 운동화자국이나 모자도 모두 제이슨 심슨의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게다가 O. J. 심슨의 전처 소생인 제이슨 심슨과 니콜 심슨은 사이가 매우 나빴답니다.

O. J. 심슨과 관련해 제시된 증거들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O. J. 심슨은 자신의 아들을 말리려고 했다가 피가 난 것이고, O. J. 심슨의 아들이니 당연히 장갑 한쪽이 O. J. 심슨의 집에 있는 것이며, O. J. 심슨도 같은 장소에 있어서 발자국이 난 것이고, 아버지에게 유전된 머리카락은 심슨의 아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랍니다.

그럴듯한 범행 동기도 제시됐다. 제이슨 심슨은 사건 당일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유명인인 아버지가 와주기로 했는데, 니콜이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시키는 바람에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헨리 리 박사는 제이슨이 격분한 채 칼을 들고 말았고, 이를 안 O. J. 심슨이 달려가 말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손을 다쳐 피를 흘린 채 비행기 시간 때문에 서둘러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무엇보다 O. J. 심슨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이를 지목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범인이 다름아닌 자기 아들이기 때문이랍니다.

위의 이야기는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한국의 CSI> (북라이프)라는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내용이다.

미국 최고의 과학수사 전문가 헨리 리 박사가 'CSI KOREA 2020 국제콘퍼런스' 행사에 22일 참석했다. '2020 과학수사의 새로운 기술'을 주제로 한 기조발제에서 헨리 리 박사는 "증거중심의 형사사법 환경 변화는 전 세계적 추세로 과학수사는 앞으로도 중요성이 커질것"이라며 "과학수사가 첨단기술과의 융합도 중요하지만 공개적인 검증을 통해 과학수사로 억울한 피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답니다.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O. J. 심슨 사건을 반영한 강조점으로 해석된다. O. J. 심슨 사건에 대한 법정공방에서 검찰에 의해 제출된 증거물의 증거능력에 관해 큰 논란이 있었고 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헨리 리 박사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 이후 DNA 대조를 위해 채취한 O. J. 심슨의 혈액 중 9/10에 해당하는 150mg이 사라지면서 사건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변호인들은 주장했다. 경찰들은 이 혈액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했다.

또 감식반이 사건 발생후 초기 현장에서 경찰들이 맨손으로 범행현장을 체크하고 증거물을 수집하기도 했다. 일부 증거는 사건현장에 처음 도착한 형사들이 확보한 다음 집에 가지고 갔다가 경찰서에 제출했다고 한다. 게다가 결정적 증거라고 제시된 피묻은 가죽장갑은 사건현장 첫 수색때 안나오고 나중에야 찾았는데, 검찰측, 그리고 사건현장을 조사한 경찰측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사건 초기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세심한 증거물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O. J. 심슨 사건은 아직까지도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다. O. J. 심슨 본인과 어쩌면 그의 아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최소한 경찰의 초기 증거확보 과정에서의 미숙함,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는 미국의 형사법 제도 등이 모두 영향을 미친 결과 거의 영구적으로 미제사건으로 남게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프로필 이력 경력

이름 본명은?
오렌탈 제임스 심슨
(Orenthal James Simpson)

출생 나이
1947년 7월 9일 (75세)
고향 출생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배우자 부인 아내 아이프
마거리트 휘틀리 (1967년 결혼 / 1979년 이혼)
니콜 심슨 (1985년 결혼 / 1992년 이혼)

자녀 가족관계
1남 4녀
학력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체 키 몸무게
185cm, 96kg
포지션
러닝백

프로 입단
1969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버팔로 빌스)
소속팀
버팔로 빌스(1969-1977)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1978-1979)

미국의 전 미식축구 선수. 별명은 전류를 뜻하는 'Juice'이다

- 선수 생활 활동 내역???

미식축구 명문인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하기 전부터 미식축구의 러닝백과 단거리 육상 선수로서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혔고,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대학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하이즈만 트로피를 1968년 수상했고, NFL 버펄로 빌스에서 9시즌,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2시즌 도합 11년 동안 뛰었다. 프로 커리어의 중요 타이틀은 버펄로에서 주로 이뤄냈답니다.

최전성기인 72~76년 5년동안 4번의 리그 러싱야드 1위, 2번의 러싱 TD 1위를 기록했고, 5년 연속 프로보울과 AP 퍼스트팀 선정 1973년 AP 선정 시즌 MVP,OPOY포함 top 5 투표에 들어가는 등 70년대 최고의 러닝백이자 최고의 미식축구 슈퍼스타였다. 당시만 해도 그가 은퇴할 때 올타임 러싱야드에서 그 위에 있던 선수는 역대 최고의 러닝백으로 칭송받는 짐 브라운뿐이었으며, 당시 정규리그는 14경기만 치뤘음에도 처음으로 시즌 2,000 야드를 돌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누구도 14게임 2000야드는 다시 깨지 못했답니다.


지난 1973년도의 게임당 143.7 야드 기록은 아직도 누구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 또한 미식축구 PER에 따르면 심슨의 1975년 시즌은 모든 프로 미식축구선수 역사상 최고 시즌으로 꼽힌다. 운동선수로의 위상만 놓고 본다면 OJ 심슨은 분명히 NFL 한 시대를 대표할 역대 최고의 러닝백들에 거론될 수준의 레전드이고, 하술할 사건과 추문이 없었다면 사실 버펄로 빌스의 역사에 남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손색이 없는 선수였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의 아이콘이었기에 마이클 조던 등장 이전 1970년대 미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1명이다. 워낙 인기가 높았던 데다 본인이 워낙 놀기도 좋아하고, 대학 시절때부터 배우 활동하는 것도 즐겨서 프로선수로 활동할 때도 비시즌엔 배우로 TV나 영화에 출연했고, 1977년엔 아예 영화사를 차리고 자기가 직접 주연한 TV 영화까지 찍게 된답니다.

70년대 영화 <타워링>이나 <카산드라 크로싱>에서는 소방관이라든지 수사관 같은 정의로운 인물로 나와 영화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특히 1988년 그가 주연 배우 중 하나로 활약한 <총알탄 사나이>(The Naked Gun)는 1988년의 북미 최고 히트작이자 역대 최고의 코미디 필름 중 하나로 극찬을 받았고, 북미의 가장 저명한 필름 전문가인 로저 이버트가 꼽은 1988년 최고의 영화로까지 꼽혔다. 1985년 NFL 명예의 전당 입당 자격이 생기자 마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끼가 넘쳐서 쇼호스트나 예능, 버라이어티 쇼도 많이 출연했음은 당연지사랍니다.

그때만 해도 NBA가 전국적인 스포츠가 아니었기 때문에 야구와 미식축구 위주로 즐기던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NFL 미식축구의 아이콘이었기에 마이클 조던 등장 이전 70년대 미국 최고의 흑인 스포츠 스타 중 1명이었다. 워낙 인기가 높았던 데다 본인이 워낙 놀기도 좋아하다보고 대학시절때부터 배우활동하는 것도 즐겼고 프로선수로 활동할 때도 비시즌엔 배우로 TV나 영화에 출연했고, 1977년엔 아예 영화사를 차리고 자기가 직접 주연한 TV 영화까지 찍게된답니다.

70년대 영화 타워링이나 카산드라 크로싱에서는 소방관이라든지 수사관 같은 정의로운 인물로 나와 영화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특히 1988년 그가 주연 배우 중 하나로 활약한 총알탄 사나이(The Naked Gun)는 1988년의 북미 최고 히트작이자 역대 최고의 코미디 필름 중 하나로 극찬을 받았고 북미의 가장 저명한 필름 전문가인 로저 이버트가 꼽은 1988년 최고의 영화로까지 꼽혔다. 1985년 NFL 명예의 전당 입당 자격이 생기자 마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끼가 넘쳐서 쇼호스트나 예능, 버라이어티 쇼도 많이 출연했음은 당연지사랍니다.

심슨은 대학교 2학년 때 이미 결혼해 3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이중 셋째 딸이었던 아렌이 두 살 생일 때 자기 집 수영장에서 사고로 익사하는 불행이 찾아온다. 이미 이혼과정에 있었지만 이 충격으로 심슨은 첫 부인과 사이가 완전히 갈라지면서 이혼하게 되었고, 이 사건 이후로 2년 뒤 나이트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당시 18세였던 니콜 브라운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고, 2명의 아이를 낳게 된다. 이후 심슨은 두 번째 부인인 니콜 브라운과도 1992년에 이혼한답니다.

- O. J. 심슨 사건 이후에는??

비록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에게 엄청난 수임료를 준 탓에 출소 후 그는 알거지가 되었고, 명성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

출소 직후 1995년에는 자신의 재판 과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I Want to Tell You: My Responses to Your Letters, Your messages, Your Questions》라는 책을 출간했답니다.

1997년 피해자 니콜과 론 골드만의 유가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패소 판결을 받고 배상금으로 총 3,350만 달러(한화 약 370억 원)를 유가족에게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회사를 설립하고, 온갖 재산을 빼돌리는 등 법의 함정들을 이용하여서 O.J. 심슨으로부터 2017년 8월까지 유가족들은 100만 달러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O.J. 심슨은 진짜로 돈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수백 달러 규모의 세금도 못내서 탈세혐의로 수감되었을 정도이기 때문이랍니다.

2007년 O.J. 심슨은 자신의 재판 과정에 대해 《만약 내가 했다면》(If I Did It)이라는 책을 고스트라이터를 통해 출판한다. 이 책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작업으로 출판되었으나, 이 책이 출판된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극도의 반발로 출판이 중단된 적이 있다. 이 때 이미 찍혔던 40만부의 책이 파기되었고, 사업계획들도 무산된다.

2007년에는 강도질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고, 2008년에는 33년형을 선고받는다. 네바다 교정청에서 복역하다 2017년 10월 2일 가석방되어 출소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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